임진강전투

임진강전투

임진왜란 때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이 임진강에서 관군을 이끌고 일본군의 북침을 막으려다 패한 싸움.

1592년(선조 25) 한강 수비의 책임을 맡았던 도원수 김명원은 임진강으로 퇴거하여 장계(狀啓)를 올려 적의 상황을 보고하자 선조는 김명원의 한강방어 실패의 책임을 묻지 않고 다시 경기ㆍ해서 군사를 징발하여 임진강을 지킬 것을 명하는 한편, 남병사 신할(申劼)이 체직(遞職)되어 돌아온 것을 수어사로 삼아 함께 임진강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당시 임진강 방어에는 명령계통이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는 도원수 김명원과 그 휘하에 부원수 이빈(李蘋), 독진관 홍봉상(洪鳳祥), 경기감사 권징(權徵), 조방장 유극량 (劉克良), 검찰사 박충간(朴忠迀), 좌위장 이천(李薦), 방어사 신할 등과, 둘째는 제도 도순찰사 한응인(韓應寅)과 부사 이성임(李聖任), 셋째는 임진강 상류 대탄(大灘:지금의 경기도 연천부근)에 전 유도대장(前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과 순변사 이일(李鎰), 전 부원수 신각(申恪) 등의 군사가 포진하고 있었다.
병력수는 도원수 휘하에 7,000명, 제도도순찰사 휘하에 서계토병(西界土兵) 1,000명, 전 유도대장 휘하에 5,000명, 도합 1만3000명이었다.

일본군의 진용을 보면 서울에 머무르고 있던 일본군은 새로운 작전계획을 짜고, 우키다(宇喜多秀家)는 그대로 서울에 머무르면서 전군을 총지휘하고, 1번대(番隊)의 주장 고니시 (小西行長)는 평양으로 가고, 3번대의 주장 구로다(黑田長政)는 황해도로 가서 1번대를 후원하고, 2번대의 주장 가토(加藤淸正)는 함경도 방면으로 가고, 4번대의 주장 모리(毛利吉成)는 강원도로 가서 2번대를 후원하기로 하였다.
다른 군에 앞서 가토군은 1592년 5월 10일 서울을 떠나 임진강에 도착하였으나, 강물이 급하여 건너지 못하고 며칠을 기다렸다. 이때 고니시가 권항사(勸降使) 야나가와(柳川調信)를 조선군 진영에 보내자, 가토는 강변에 소수의 군사만 남겨두고 파주 쪽으로 철수하였다.

조선 진영에서는 일본군의 전세가 불리하다는 헛된 보고가 계속 날아드는 데다 적이 여러 날 싸우지 않는 것을 보고, 그것을 사실로 믿고 행조 (行朝)에서도 도원수에게 엄책하여 속히 싸울 것을 명하였다. 조방장 유극량은 강을 건너 싸우자는 제장(諸將)의 주장을 듣고 적의 유인작전에 말려드는 것이라 하여 극구 반대하였으나, 군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패배를 예견하였지만 신할을 따라 도강하였다. 도원수도 도하작전을 반대하였지만 명령계통이 분분하여 이를 막지 못하였다.

17일 가토군의 기습을 받아 신할ㆍ유극량 등의 장수가 전사하였으며, 많은 관군이 돌아오지 못하고 강물에 빠져 죽었다. 결국, 큰 기대를 걸었던 임진강방어전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실패로 끝났으며, 일본군은 27일 임진강을 건넜고, 도원수 김명원과 도순찰사 한응인 등은 패한 다음 평양 행재소(行在所)로 돌아왔으나, 선조는 형편상 죄를 물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