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전투

충주전투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이 충주에서 대패한 전투이다.
1592년(선조 25) 4월 부산에 상륙한 왜군 대병력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북방 방비에서 용맹을 떨친 신립을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임명하여 이를 막게 하였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뒤 4월 24일 부장 몇 사람과 조령(鳥嶺)으로 달려가 형세를 살필 때, 먼저 경상도로 남하하였던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패하여 돌아왔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 등이 "우리의 적은 군대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곳은 마땅히 지형이 험한 조령뿐이다."고 하였으나, 신립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이곳에서는 기병(騎兵)을 쓸 수 없으니 마땅히 평원에서 일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6일 그는 드디어 충주의 서북 4㎞ 지점에 있는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앞에는 논이 많아 말을 달리기에 불편하였다. 27일 고니시(小西行長)가 거느린 왜군은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丹月驛)에 이르렀고, 충주목사 이종장(李宗長)과 순변사 이일이 척후로 나갔지만, 적군에게 길이 막혀 신립은 적정(敵情)을 정탐할 수 없었다.

28일 새벽 왜군은 부대를 나누어 본진은 충주성에 돌입하고, 좌군(左軍)은 달천(達川) 강변으로 숨어 내려왔으며, 우군(右軍)은 산으로 숨어 동쪽으로 나가 강을 건넜다. 신립은 당황하여 충주성으로 급히 말을 달렸으나, 군대의 전열이 미처 정비되기도 전에 성안의 왜군이 나팔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출격하여 조선의 관군은 크게 패하였다. 신립은 탄금대로 돌아와 부장 김여물과 함께 적병 수십명을 사살한 뒤에 힘이 다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충주의 사민(士民)과 관속은 우리의 군대를 믿고 피난하지 않았기 때문에 왜군에게 희생된 사람이 다른 지방보다 많았다. 한편, 신립의 패보(敗報)가 조정에 전해지자 민심이 극도로 혼란해지고, 국왕은 서울을 떠나 평안도로 피난하게 되었다.
충주전투 충주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