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면

김면(金沔) 1541(중종 36) ~ 1593(선조 26)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庵). 고령 출신.

아버지는 경원부사 세문(世文)이며, 어머니는 김해김씨로 판관 중손(仲孫)의 딸이다. 일찍이 성리학의 대가인 조식(曺植)을 사사하였고, 이황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마했다.

명종 때 효도와 청렴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으며, 선조 즉위 초년에 유현(儒賢)을 뽑아 육품직에 승진시켰는데, 조목(趙穆)ㆍ성혼(成渾)ㆍ정구(鄭逑) 등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지만 역시 사퇴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조종도ㆍ곽준ㆍ문위 등과 함께 거창과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과 개령 사이에 주둔한 적병 10만과 우지(牛旨)에서 대치, 공격해오는 적의 선봉을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지례(知禮)에서 역전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대첩으로 합천군수에 제수되었으며, 그뒤 무계(茂溪)에서도 승전을 거듭하여 9월에 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고, 11월에 의병대장의 교서를 받았다. 이때 호남의 도백(道伯)에게 군사와 군량의 도움을 청하였으나 회답이 없으므로 스스로 무기를 수선하고 사졸을 격려하여 전투에 임했으며, 호남과 영남 의병장들과 함께 4도로 진병하고자 하였으나 그 약속이 이행되지 못하자, 혼자 군사를 이끌고 고령ㆍ지례ㆍ금산ㆍ의령 등을 수복하였다. 이에 왕이 그 공적을 장하게 여겨 이들의 군사로 근왕(勤王)하게 하고자 명하였는데, 백성들이 통곡하며 보호를 청하고 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이 장계를 올리니 본도에 머물러 수호하라는 교서가 내려졌다.

그 이듬해인 1593년 1월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충청ㆍ전라도 의병과 함께 금산에 진주하여 선산(善山)의 적을 격퇴시킬 준비를 갖추는 도중, 갑자기 병에 걸리자 자신의 죽음을 발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여러 장수가 그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신창(新倉)까지 돌아온 뒤에야 발표하니, 일군(一軍)이 통곡하고 백성들이 지극히 애통해하였다. 관찰사 김성일이 장계를 올려 보고하니, 왕이 애도하여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고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를 명하였다. 정구와 교분이 깊었으며, 강개한 절의가 있었고, 문장보다 성현의 본지(本旨)를 묵수하여 실천에 힘썼는데, 특히 이정(二程)의 글을 좋아하고 본받으려 하였다.
고령의 도암사(道巖祠)에 배향되었으며, 1607년에 다시 선무원종공(宣武原從功)에 기록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송암실기》 3권 1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