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홍

정인홍(鄭仁弘) 1535(중종 30) ~ 1623(인조 1)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菴). 합천(陜川)출신.

건(健)의 아들이다. 조식(曺植)의 수제자로서 최영경(崔永慶)ㆍ오건(吳健)ㆍ김우옹(金宇옹)ㆍ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경상우도의 남명학파(南冥學派)를 대표하였다. 1573년(선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오르고, 1575년 황간현감에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지평을 거쳐 1581년 장령에 승진하였다. 당파가 동서로 양분되자 다른 남명학파와 함께 동인편에 서서 서인 정철(鄭澈)ㆍ윤두수(尹斗壽) 등을 탄핵하려다가 도리어 해직당하고 낙향하였다.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를 계기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립될 때 북인에 가담하여 영수(領首)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성주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고, 10월 영남의병장의 호를 받아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ㆍ합천ㆍ고령ㆍ함안 등지를 방어하였으며, 의병활동을 통하여 강력한 재지적 기반(在地的基盤)을 구축하였다.
1602년 대사헌에 승진, 동지중추부사ㆍ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하였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여 파직하게 한 다음 홍여순(洪汝諄)ㆍ남이공(南以恭) 등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으며, 이어 유성룡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였던 성혼(成渾) 등 서인을 탄핵하였다.

북인이 선조 말년에 소북ㆍ대북으로 분열되자 이산해(李山海)ㆍ이이첨(李爾瞻)과 대북을 영도하였으며,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자 적통(嫡統)을 주장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에 대항하여 그는 광해군을 적극 지지하였다.
1607년 선조가 광해군에 양위하고자 할 때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반대하자 탄핵하였다가 이듬해 소북 이효원(李效元)의 탄핵으로 영변에 유배되었다.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배도중 풀려나와 대사헌에 기용되어 소북일당을 추방하고 대북정권을 수립하였다.
대북정권의 고문 내지 산림(山林)의 위치에 있던 그는 유성룡계의 남인과 서인세력을 추방하고 스승 조식의 추존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문묘종사 문제를 둘러싸고 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을 비방하는 상소를 하여 두 학자의 문묘종사를 저지시키려 하다가 8도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았고, 성균관 유생들에 의하여 청금록(靑襟錄:儒籍)에서 삭제되는 등 집권을 위한 싸움으로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612년(광해군 4) 우의정이 되고, 1613년 이이첨과 계축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같은해 좌의정에 올라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1618년 인목대비 유폐사건에 가담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광해군 때 대북의 영수로서 1품(品)의 관직을 지닌 채 고향 합천에 기거하면서 요집조권(遙執朝權)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당하였으며, 끝내 신원되지 못하였다. 저서로는 《내암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