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영

처영(處英) 생몰년 미상

호는 뇌묵(雷黙).

휴정(休靜)의 제자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난갔을 때, 휴정은 8도의 승려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승으로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때 처영은 1, 000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권율(權慄)과 함께 금산 배고개전투〔梨峙戰鬪〕에 참여하여 크게 전공을 세웠다.
1593년 2월 권율과 함께 북진하여 수원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진을 치고 왜적 우키타(守喜多秀家)의 공격을 물리쳤다. 그리고 권율이 3, 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였을 때, 700승병을 이끌고 한 방면을 담당하여 적병 3만과 대전하여 2만4000명의 사상자를 내게 함으로써 임진왜란 이후 최대의 승첩을 거두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라는 직함을 내렸다.

그 뒤 1794년(정조 18) 왕명으로 휴정ㆍ유정(惟政)ㆍ처영의 진영(眞影)을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표충사(表忠祠)와 묘향산 수충사(酬忠祠)에 봉안하고, 관에서 춘추로 제관과 제수를 보내어 향사하게 하였다. 또한, 그 공덕을 찬송하여 '방가주석 선문목탁 동시임란 공존사직 일체거의 보제군생 의병부장 가선대부 중추부사 뇌묵당대선사(邦家柱石 禪門木鐸 同時臨亂 功存社稷 一體擧義 普濟群生 義兵副將 嘉善大夫 中樞府使 雷黙堂大禪師)'라는 찬호(贊號)와 직품을 추증하였다.
《금산사지》에는 그가 어릴 때에 금산사에 출가하고, 뒤에 휴정을 참방하여 선지(禪旨)를 받았다는 기록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국일도대선사 부종수교 보광현랑 뇌묵(國一都大禪師 扶宗樹敎 寶光玄朗 雷黙)의 법호를 내렸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