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억기

이억기(李億棋) 1561(명종 16) ~ 1597(선조 30)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수(景受).

연손(連孫)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 17세에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이 되고, 그뒤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다. 특히, 북방 오랑캐가 침입하였을 때 경흥부사로 임명되어 적을 격퇴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뒤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아, 온성부사 등 국방상의 요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1591년(선조 24) 순천부사를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전라우수사가 되어,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등과 합세하여 당항포(唐項浦)ㆍ한산도(閑山島)ㆍ안골포(安骨浦)ㆍ부산포(釜山浦) 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억기 유품 이억기 유품

1596년에는 휘하의 전선(戰船)을 이끌고 전라좌ㆍ우도 사이를 내왕하면서 진도와 제주도의 전투준비를 성원하는 한편,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본영을 응원하는 등 기동타격군의 구실을 수행하였다.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잡혀가 조사를 받게 되자, 이항복(李恒福)ㆍ김명원(金命元) 등 조정대신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의 무죄를 극구 변론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통제사 원균 휘하에서 조정의 무리한 진격명령을 받고, 부산의 왜적을 공격하였다가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패하여 원균ㆍ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1592년 6월 5일 당항포해전 이래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의 공적은 이순신ㆍ원균 등과 다를 바 없었으나, 1592년 5월의 옥포(玉浦)ㆍ사천(泗川)ㆍ당포(唐浦) 등지의 초기 해전에 참여하지 못하였던 관계로, 임진왜란 후 공신책정(功臣策定)때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2등으로 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완흥군(完興君)으로 추봉되었다. 1600년 여수의 충민사(忠愍祠)에 이순신과 함께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민(毅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