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각

신각(申恪) ? ~ 1592(선조 25)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경안(景顔)이다. 작은아버지 경민(景閔)에게 입양되었다.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초에 연안ㆍ영흥의 부사를 거쳐, 1574년(선조 7)경상좌수사, 1576년에 경상우병사를 역임하였다.

1586년 강화부사를 거쳐 이듬해 경상도방어사가 되었으나, 영흥부사 재직시에 신창현감(新昌縣監) 조희맹(趙希孟)이 그의 첩에서 난 아들을 납속(納粟)시켜서라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하여달라는 요청을 받고 관의 곡식을 꺼내어 그 납속을 충당해주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서울의 수비를 위하여 수성대장(守城大將) 이양원(李陽元)휘하의 중위대장(中衛大將)에 임명되었고, 다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휘하의 부원수로서 한강을 지켰다. 이때 김명원은 임진에 가 있었으므로 유도대장(留都大將)이양원을 따라 양주에 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수습하고 함경도병마사 이혼(李渾)의 원군과 합세하여 양주 해유령(蟹踰嶺)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적의 머리 70급(級)을 베었는데 이것은 왜란 초기 처음 있는 승첩이었다. 그러나 이양원이 산골에 숨어 있어 소식이 끊겼는데, 그가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양원을 따라 도망쳤다는 내용의 장계(狀啓)가 올려져 당시 우의정 유홍(兪泓)에 의하여 참형을 당하였다. 이날 오후 양주에서 다시 첩보가 도착하자 왕이 그를 죽이지 말라고 선전관을 뒤따라 보냈으나 이미 처형된 뒤였다.

무인이었으나 청렴, 근신하였으므로 비명에 죽은 것을 모두 애석해하였다. 그의 처 정씨(鄭氏)는 남편이 죽자 장사를 지낸 뒤 자결하였는데, 정조 때에 열녀문이 세워졌다. 연안의 현충사(顯忠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