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규

영규(靈圭) ? ~ 1592(선조 25)

본관은 밀양박씨(蜜陽朴氏). 호는 기허(騎虛). 공주출신.

계룡산 갑사(甲寺)에 들어가 출가하고, 뒤에 휴정(休靜)의 문하에서 법을 깨우쳐 그의 제자가 되었다. 공주 청련암(靑蓮庵)에 있으면서 선장(禪杖)을 가지고 무예를 익히기를 즐겼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을 통곡하고 스스로 승장이 되었다. 의승(義僧)수백명을 규합하여 관군과 더불어 청주성의 왜적을 쳤다. 관군은 패하여 달아났으나 그가 이끄는 승병이 분전하여 마침내 8월초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이어 의병장 조헌(趙憲)이 전라도로 향하는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일본군을 공격하고자 할 때, 그는 관군과의 연합작전을 위하여 이를 늦추자고 하였다. 그러나 조헌이 듣지 않자 그는 조헌을 혼자서 죽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조헌이 이끄는 의사와 영규가 거느린 승군은 1592년(선조 25) 8월 18일 금산전투에서 최후의 한사람까지 싸워 일본군의 호남침공을 저지하였다. 서울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갔던 선조는 청주성 승전의 소식을 듣고, 영규에게 당상의 벼슬과 옷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영규는 임금이 내린 상사(賞賜)가 도착하기 전에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승병이 일어난 것은 그가 최초로서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궐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으며, 뒤에 법도(法徒) 대인(大仁) 등이 금산 남쪽 진락산(進樂山)기슭에 그의 영정을 안치한 진영각(眞影閣)과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