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현

송상현(宋象賢) 1551(명종 6) ~ 1592(선조 25)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시호는 충렬(忠烈).

현감 복흥(復興)의 아들이다. 어려서 경사(經史)에 통하여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고 20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보임되고, 저작(著作)ㆍ박사(博士)에 승임(陞任)되었다. 이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1583년 지평으로 들어와 예조ㆍ호조ㆍ공조의 정랑이 되었다. 이듬해부터 두 차례에 걸쳐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다시 지평을 지내고 배천군수로 나갔다가 3년 만에 전직되어 경력(經歷)ㆍ집의ㆍ사간과 사재감(司宰監)ㆍ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이 되었다.
1591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동래부사가 되었다. 왜침의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방비를 굳게 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4일 부산진성을 침범한 왜군이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하자 이때 부사인 그는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할 뜻을 천명하였다.
그뒤 적군은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고 15일에 전투가 전개되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당하자 조복(朝服)을 덮어 입고 단좌(端坐)한 채 순사하였다.
왜장 히라요시(平義智) 등이 그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지내주었다 한다.

후에 이조판서ㆍ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산 충렬사ㆍ개성 숭절사(崇節祠)ㆍ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ㆍ고부 정충사(旌忠祠)ㆍ청원 충렬묘(忠烈廟)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