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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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호국정신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 속으로 여행을 떠나자!
  • 임진왜란 관련 행사나 승첩지 등 여러분의 역사의 현장체험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사천 선진리성 1 사천 선진리성 2 사천 선진리성 3 사천 선진리성 4 사천 선진리성 5

사천 선진리성

  • 주소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770번지 일원 
  • 전화번호 055) 831-2725 (문화관광과)
  • 홈페이지 사천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 지정번호 : 제 274 호 * 지정일자 : 1998년 9월 8일 * 규모 : 76,637㎡ 사천읍에서 서남쪽 약 7km지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사천만의 동안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구릉의 지형을 이용하여 구축한 평산성식의 토축으로 된 창성이다. 이 倉城은 본래 서남북의 삼면이 바다에 임하고 東쪽 一面만 육지로 通하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수륙요새였다. 그러나 지금은 간척 사업으로 인하여 남북의 이면은 모두 농경지로 변하고 서쪽 일면만 바다로 연해 있으며 성지는 모두 밭으로 개간되어 고지 일부만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성은 왜성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는 정유재란때 왜군이 사천 지역을 장악한 후 이곳을 중요 거점으로 삼기 위해 당시 왜장이 었던 모리길성으로 하여금 성을 구축했다는 일본측 기록 즉 도진가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 성에 관한 우리의 관계 문헌이 많이 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고적(古跡)을 고찰(考察)해 보면 결코 왜성(倭城)이 아니라는 확증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이 성(城)이 위치한 지명(地名)부터 살펴 보면 고려초(高麗初) 남도수군(南道水郡(軍)에 설치한 12조창(漕倉) 중의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자리한 곳으로 조창이 설치될 무렵 이곳의 지명(地名)을 통양포(通陽浦)또는 통조포(通潮浦)라 하였다. 이어 조선 초기에 통양포(通陽浦)가 다시 통조포(通潮浦)로 변했는데 조창명(漕倉名)도 이에 따라 통양창(通洋倉)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사천현조(泗川縣條)에 의하면 이때가 태종(太宗) 3年(1403)의 일로써, 이후 통양창(通洋倉)은 왜구(倭寇)의 빈번한 침입(侵入)으로 조운(漕運)이 폐지되고 조세운송(租稅運送)은 육로(陸路)로 전환(轉換)되었다. 임진란(壬辰亂)이후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이곳의 지명(地名)을 법질도(法叱島), 선창(船滄), 신채(新寨), 동양(東陽), 그리고 동양창(東洋倉)따위로 기록(記錄)하고 있다. 이 가운데 동양(東陽)과 동양(東洋)은 전사(戰寫)과정에서 음운상(音韻上) 통양(通陽)과 통양(通陽)의 오사(誤寫)로 여겨진다. 그리고 신채(新寨)라 함은 泗川古城과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나무울로 된 왜채(倭寨)를 뜻한다. 조선후기에는 수군(水軍)의 진보(鎭堡)인 전선소(戰船所)가 설치되어 선진(船鎭) 또는 선소(船所)라 했고 舊韓末때는 계(溪)라 불렀으나 1914년 행정구역(行政區域) 병합(倂合)에 따라 연포동(連浦洞), 통양동(通洋洞)일부를 편입시켜 오늘의 선진리(船津里)가 되었고 성명(城名)도 선진리성(船津里城)이 된 것이다. 다음은 조창지(漕倉地)로서의 선진(船津)에는 이를 지키기 위해 창성(倉城)이를 뒷받침해 주는 문헌(文獻) 가운데 동국여지지(東國與地誌)와 사천현여지승람(泗川縣與地勝藍) 고적조(古跡條)에 의하면, 고통양창 재현남십칠리통양포상 고려초설창수 부근주현조세조지경즉12창지일금유토성기지주3816척(<동국여지지>사천현고적조) [古通陽倉 在縣南十七里通陽浦上高麗初設倉收附近州縣祖稅漕至京卽十二倉之一今有土城基址周三千八十六尺<東國與地志>泗川縣古跡條] 즉 "고려초(高麗初)에 설치한 고통양창(古通陽倉)은 현(縣)의 남쪽 17里 통양포상(通洋浦上)에 있고 부근(附近) 고을의 조세(租稅)를 거두어 서울(당시는 開城)로 조운(漕運)하였으니 곧 12조창(漕倉)의 하나로 지금도 둘레 3,086尺의 토성(土城)터가 남아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두 기록(記錄)에서 세 가지의 공통점을 들 수 있다. 첫째는 거리 17里이고 둘째는 조세(租稅)를 거둬들인 창(倉)이 있는 점, 셋째는 토성지(土城址)3,086尺의 규모이다. 여기 거리 17里(1里는 약 400m)는 지금의 6.8km가 되므로 당시 현청(縣廳)의 소재지 사천읍에서 조창지(漕倉地) 선진(船津)까지는 7km가 된다. 그리고 셋째의 토성지 는 창성으로서 지금도 그 형적의 일부가 역력히 남아 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여지껏 이 토성지는 옛 당병성 터, 또는 왜성으로 잘못 알려져 온 것 이다. 조창의 기능은 원래 국가 경영의 재정적 세원을 거두어 보관했다가 해로를 통해 중앙에 조운한 기지였으므로 그 중요성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중앙에서 판관이 파견되어 이를 관장하였고, 한편으로는 해구의 침입과 약탈을 막기 위해 창성을 쌓고 수군이 방어하였으니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부터 이곳에 택지된 까닭은 지정학상 이 지역은 일찍이 수도경작이 시작되어 물산이 풍부하였고 또 바닷길이 열려 삼한 때부터 무역 관계를 개설하여 布, 鐵등의 물자를 중국과 일본에 교역하였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임진란시 이 성을 중심으로 바다와 육지에서 두 차례의 큰 싸움이 있었다. 그 하나는 해전으로서 선조 25年(1592) 5月 29日 함선 23척을 이끌고 여수본영을 떠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선진 앞 바다에 이르러 거북선을 앞세워 왜적과 치열한 싸움 끝에 적선 13척을 모조리 쳐부수는 전과를 올렸으니 이 싸움이 李忠武公의 제2차 사천 해전이며 이때 해전 사상 처음으로 거북선이 등장하였다. 다음은 육전으로서 정유재란 때인 무술년 10월 초하루 明나라 중로제독 동일원은 마병, 보병으로 구성된 전병력을 동원하여 이 성을 공격했다. 적은 8,000여 병력으로 아군의 1/4정도였다. 이때 보병유격장 팽신고는 적의 성채를 공격하던 중 진중에서 화포의 오발로 탄약궤에 인화되어 화염이 치솟고 아군이 혼란에 빠지자 효기를 포착한 성채의 적이 역습으로 나와 먼저 팽신고의 포진지를 유린하였다. 이때 유격장 모국기와 엽방영이 성채 북쪽의 고지에서 잔병을 수습하고 적 출격대의 배후로 돌아 성으로 돌진하여 성에서 나온 적을 괴멸직전까지 몰아 넣었으나 아군은 먼저 기병제장의 전열이 흩어져 북으로 패주했다. 이 싸움에서 아군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며 당시 치욕의 전흔 지금의 선진리성 위치한 조명군총이다. 『(전략) 채삼면임강 일면통육 인해위호 해 박채하천계 축금해 고성위좌우익 일원분마보래공 보병유격팽신고대부격채 쇄기수처중군진핍적호 훼기책홀영중포열 연염창천 적승세충격 고성원적역지 기병제장선분 일원역환진주』 ≪사천현여지승람≫ (1699년간)에 의하면 숙종조 때 선진리에는 수군의 전선소 즉, 진보가 설치되어 전선, 병선 각 1척과 사후선(=정탐선) 2척이 상시 배치되어 해안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성내에는 비후과 수전군기고 그리고 관해정 등의 건물이 있었는데 병력으로는 수군 40주사사 및 도합 156명이었다. 목태림이 쓴 동성부에 의하면 능노군 145, 포수 34, 화포수10, 사궁 30명 등이 상주하고 영조 36년(1760)년 설치한 晉州 가산창의 방어 임무 뿐 아니라 수시로 부조할 때 호위를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대원군은 연해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해안 방어의 요충과 변방의 중요한 곳에 많은 진을 설치했다. 이때 외적방어에 효과가 많은 포군을 많이 양성했는데 포군은 조총을 주로 사용한 총 수와 화포를 사용한 포군이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 때인 1895年 통제영을 비롯하여 각 도의 수영이하 모든 군영을 해체하고 배를 비롯한 모든 장비는 군부로 넘어 갔는데 선진에 진보도 이때 해체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앞서 1894 동학난이 일어났을 때 동학 농민군이 선진리 성내에 있던 군기고의 무기 일부를 탈취하여 고승당산에서 일본과 싸웠다는 전설이 있다. 선진리성은 일제 때 일제당국에 의해 임진난시 일본군의 전승지라 하여 관심을 끌은 바 있고, 1936년 5월에는 이 성를 고적 제 81호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63년 1월 21일자로 사적 제 50호로 지정되었으나 다시 1998년 9월 8일자로 지방문화재 자료 274호로 지정되었다. 무술전투 당시 왜장이었던 도진의홍의 후예들이 1918년경 이 성터의 일부를 매수 또는 기부받아 공원으로 조성하고 공원 정상에다 사천신채전첩지비라 새긴 비석을 세웠으며, 때때로 일군 장성들이 그들 조선의 전적지라 하여 돌아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비석은 해방되던 그 해 주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다만 그때 심은 벚나무 천여주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사천에서는 1978년 사업비 4,700여만원을 들여 공원경내에 이충무공 사천해전승첩비를 세우고 충무공 이순신이 이 곳 선진 앞 바다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선을 격파한 국난 극복사의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 일본 사람들이 세웠던 비석자리에는 6.25 전쟁때 산화한 공군장병 전몰자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충령비가 우뚝 서 있다. 현재 경내에는 편의시설 2동과 돌계단 70m 가 설치되어 있고 공원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편의 뿐 아니라 공원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고 있으며 야외 공연장도 마련하여 공원을 찾는 단체 및 학생들의 공연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 서남북의 삼면이 바다에 임하고 東쪽 一面만 육지로 通하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수륙요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