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연합군의 반격과 종전

조명 연합군의 반격

조선의 상황의 급박함을 전해 받은 명나라는 병부상서 형개(邢玠)를 총독, 첨지도어사(僉知都御使)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摠兵官)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재차 구원군을 파견했다. 양호는 평양에 머무르고 마귀가 먼저 서울에 들어와 6월에 제 장수를 나누어 해당지역을 지키게 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는 체찰사 이원익(李元翼), 도원수 권율(權慄) 휘하의 이덕형(李德馨)ㆍ김수(金睟) 등으로 흥복군(興復軍)을 창설하게 하여 8도에서 군사를 모집하였다.
또 명군의 작전계획에 따라 장관을 분송하여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門), 방어사(防禦使) 권응수(權應銖)는 경주에 주둔하여 조령을 막고, 우병사 김응서는 의령에 주둔하여 부산로(釜山路)를 막게 하였다. 그밖에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별장(別將) 신호(申浩), 남원부사(南原府使) 임현(任鉉) 등은 모두 명장 양원을 따라 남원을 수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원성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에 패하였다. 이후 명나라 군은 한강에 주둔하며 서울을 지켰으며 경리(經理) 양호(楊鎬)도 평양에서 급히 서울로 내려와 일본군의 북침 저지를 지휘하였다.

이후 양호는 부총병 해생(解生)ㆍ우백영(牛伯英) 등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나가 적을 막게 하여 9월 5일 여명에 직산 북방 소사평에서 구로다 군과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의 북진은 차단되었다.

한편 재차 삼도수군통제사로 임용된 이순신이 소사평의 대첩이 있은 지 10일이 지난 9월 16일 명량해협에서 큰 승리를 거둬 일본군의 서쪽 해상으로의 진출을 봉쇄하였다. 이후 겨울이 다가오자 일본군은 더 이상 공격을 멈추고 남해안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명나라 군은 남원성에서 패전한 이후 적극적인 전략을 구사하여 수륙 구원군을 투입하였고, 이순신도 명량대첩 이후 본영 우수영이 황폐하여 1598년(선조 31) 2월에 고금도로 진을 옮겨 일면 전투 일면 건설의 장기작전을 수립했다.
한편으로는 병영을 설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난민을 이주시켜 생업에 종사시키니 단시일에 민가가 수만호에 이르게 되었다. 이해 7월에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이 이끄는 수군 5천 명도 고금도에 합세하게 되었다.

이후 양호가 파직되고 천진순무(天津巡撫) 만세덕(萬世德)이 임명되자 명나라 군은 일본군에 대한 총공세를 취하기로 하고 4로(四路)로 나뉘어 일제히 남진하기 시작했다. 수군에서도 진린은 이순신과 함께 1만 3,300명이나 되는 군사로 해상을 담당하게 했으나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도요토미의 사망과 종전

1597년 8월 18일 침략의 주도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였다. 도요토미의 죽음을 숨긴 채 회군하라는 유언에 따라 일본군은 차례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명의 제독 유정(劉綎)은 순천의 고니시군이 철수한다는 보고를 받고 육상에서 이를 공략하였고, 진린과 이순신은 해상에서 이를 봉쇄하니 퇴로를 얻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일본군과의 격전이 수일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뒤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은 유정이 10월 16일에 군사를 철수시켜 수륙협공작전도 마지막 기회에 수포로 돌아갔다.

고니시는 진린에게도 뇌물을 주어 퇴로를 열어줄 것을 간청, 진린이 이에 응하려 하였으나 통제사 이순신의 설복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니시의 구원요청을 받은 시마즈가 스스로 병선 500여 척을 이끌고 11월 18일 저녁에 어둠을 틈타 남해 노량으로 습격해왔다. 이순신은 분향으로 하늘에 맹세하고 명군과 함께 호응하여 노량에서 적의 선대를 맞아 적 함대의 절반을 분파하였다. 적은 견디지 못하고 남해 관음포로 빠졌으나 퇴로가 막혀 다시 나오는 것을 이순신이 친히 적진에 뛰어들어 독전하던 중 적의 유탄에 맞아 운명했다. 유명을 받은 조카 이완(李莞)이 대신 지휘하여 적함 200여 척을 분파하고 왜군을 무찔렀다. 시마즈 등은 50여 척을 건져 간신히 탈주하였고, 고니시는 격전 중에 묘도로 몰래 빠져나갔으며, 유정은 순천으로, 진린은 남해로 돌아갔다.

도요토미가 죽고 일본의 내정이 불안하여 왜군이 급히 철수하는 줄은 얼마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은 끝이 났다. 이때 좌의정 이덕형(李德馨)과 황신(黃愼) 등은 상소하여 명군과 함께 쓰시마를 칠 것을 청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1599년(선조 32) 명군이 철수하게 되었다. 1월에 유정ㆍ진린ㆍ마귀ㆍ동일원(蕫一元) 등이 병영을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오고 4월에는 총독 형개가 이들 4로병(四路兵)을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경리 만세덕ㆍ도독동지(都督同知) 이승훈(李承勳)ㆍ산동안찰부사(山東按察副使) 두잠(杜潛) 등이 군사 2만 4천으로써 잠시 서울에 주둔하다가 다음해 9월 서울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