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의주 파천

임진왜란의 과정
  • 임진왜란 초기의 의병과 조선 수군의 활약상을 살펴보자.

선조의 의주 파천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의 피난길을 알아보자.
1592년 4월 29일 신립이 충주성 전투에서 패했다는 보고를 받고 선조는 파천[播遷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난하던 일]할 것을 결심했다. 30일 새벽 선조는 세자 광해군을 비롯한 1백여 명의 신하들과 함께 돈의문[敦義門서울 서쪽의 정문. 사대문의 하나로, 서궐(西闕) 앞 서쪽의 마루턱, 지금의 신문로 언덕에 있었으나 1915년에 헐었다]을 나서 파천 길에 올랐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30일 파천광경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강을 지키던 병사가 선조와 신하를 보고 엎드려 통곡하니 좌우에 서 있던 신하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밤은 칠흙 같이 어두운데 한 개의 등촉[燈燭등불과 촛불을 아울러 이르는 말]도 없었다. 밤이 깊은 후에 겨우 동쪽의 둑까지 닿았다. 강을 지키던 병사가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人家)를 없애도록 명했다. 이는 일본군이 인가를 헐어 뗏목으로 이용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백관[百官벼슬아치]들은 굶주리고 지쳐 촌가[村家시골 마을에 있는 집]에 흩어져 잤는데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절반을 넘었다.’

선조가 파천 길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5월 3일 한양은 일본군에게 힘없이 함락 당했다.
이 과정에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렸다.

한편, 궁궐이 불타고 관군이 저항조차 제대로 못하고 무너지는 상황이었지만 6월 이후 조선 팔도 곳곳에서는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당시의 임금과 신하라면 어떻게 하였을지 자신의 의견을 말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