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사랑

나라사랑

나라는 곧 현대적 의미로서 국토와 국민, 주권의 3요소를 내포한 국가이다. 애국, 즉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이란 주권을 가진 주체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국토와 국민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이 나라를 사랑하고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의 충정은 《난중일기》《장계》뿐 아니라, 사사롭게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순신은 말과 글로써만 나라를 사랑한 것이 아닌, 진정으로 마음과 행동을 일치하여 실천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깊다.
32세에 무관의 길에 들어선 이순신 장군은 국토수호 및 나라사랑에 일생을 헌신하였다. 계급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변방의 작은 관직에 있을 때에도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였으며, 임진왜란 발발 이후에 는 조선 수군의 수장으로서 나라의 바다를 목숨 걸고 지켜내었다.
무관으로써 장군의 나라사랑 길은 평탄치 않았다. 상관들의 모함으로 파직과 백의종군을 경험하기도 하였으며, 해전에서 연승하며 위기의 나라를 구해내는 큰 공을 세우지만, 죄인으로 몰려 처형 직전에 이르는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힘든 시련 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장군은 1598년 11월 퇴각하는 일본군을 맞아 노량해전 선상에서 전사하기까지 나라사랑을 굳건히 실천하였다.
제승당에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있는 이순신장군 모습 우국애정도-제승당

이순신 장군의 굳은 나라사랑은 또한 백성사랑으로 이어진다.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장군은 항상 백성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였으며,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며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은 난중일기를 비롯한 여러 관련 기록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만일 왜선을 모두 불태워 왜적을 도망할 곳 없는 막다른 골목의 도적이 되게 한다면 숨어 있는 우리 백성들이 살육을 당할지도 모르므로 잠시 1리쯤 물러 나와 밤을 지냈다.(견내량파왜병장, 7월 17일)

1592년 7월 이순신 장군은 역사적인 한산도해전안골포해전에서 대승을 거둔다. 장군은 전투 중에 적선을 모두 파괴하지 않고 한 두 척을 남겨두는데, 이는 도망할 곳 없는 적들이 우리 백성들을 살육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이러한 장군의 모습은 이후에도 일관되게 여러 차례 목격된다.
다음은 명량해전을 앞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백성들을 먼저 안전하게 피난시키는 장군의 모습이다.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띄워 보내서 피난민들에게 어서 뭍으로 올라가도록 타이르라고 하였다.(난중일기 1597. 9. 13)

3일 후 조선수군은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적선과 맞서 싸우는 명량해전을 치르게 된다. 이 해전은 조선 수군의 재건, 나아가 나라의 존폐가 걸린 중요한 전투였다. 장군은 이렇게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도 백성을 먼저 생각한 것 이다. 이는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이후로도 이순신 장군은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을 보호하고, 이들이 군의 보호 아래 어로와 농사를 통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보살피는 등 한결같은 마음으로 백성을 돌보았다.
이순신 장군의 나라사랑 길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장군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모든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돌보는 실천적인 나라사랑의 삶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