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팔가해전

트라팔가르 해전은 나폴레옹전쟁시대에 일어난 가장 유명한 해전이다.
서유럽 대부분을 재패한 나폴레옹은 그의 제국을 동쪽으로 더 넓히고, 영국을 정복하고자 했으나, 이는 트라팔가에서 넬슨과의 전투로 한나절의 꿈이 되고 말았다.
트라팔가 해전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이후, 영국은 수 년동안 바다의 지배자로 남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나폴레옹의 야망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유명한 감옥이었던 바스티유를 폭도들이 불태웠다.
프랑스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혁명은 프랑스 절대왕정의 몰락을 가져왔고 프랑스가 공화국이 되는 초석이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주변 왕정 국가들의 반대를 불러왔다. 왕정 국가들의 왕족들은 자신의 나라에서도 이러한 혁명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그들은 연합하여서 프랑스에서 다시 절대 왕정 정부를 세우고자 하였다.
1792년부터 젊은 프랑스 공화당원과 왕정국가들의 군대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 전쟁은 한 남자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그의 이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트라팔가해전도 트라팔가해전도

나폴레옹은 원래 해군장교가 되고자 했으나, 그는 포병장교가 되어야 했다. 왕족과 귀족들의 자제만이 해군장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20살이었으나 1793년의 영국과의 전투, 1795년의 오스트리아와의 전투로 순식간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1797년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였던 비엔나로 가서 항복하라고 강요했다. 이로 인해, 1797년 10월 17일에 오스트리아는 캄포 포르미오조약에 서약하였고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할양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폴레옹전쟁의 첫 번째 장은 막을 내리게 되었고 이로서 그는 그의 관심을 영국으로 돌리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1797년에 프랑스인들을 설득하여 영국왕정이 반드시 자신들에 의하여 무너져야 전 유럽이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이렇게 전쟁명분을 만들어가며, 그는 영국 침략을 위해 모든 역량을 해군을 세우는데 쏟아 부었다. 영국 침략 계획은 그러나 넬슨 제독과 영국해군에 가로막히게 되었다.

아미엔조약이 1802년에 조인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약 14개월 동안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이 시기 나폴레옹은 강력한 권력을 쌓아가고 있었으며 마침내 1804년 12월 2일에 스스로 나폴레옹 1세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 이 날 이후로, 자신의 제국을 더 넓히고자 하는 나폴레옹의 야망은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점령하고자 다시 계획을 세웠다.

넬슨제독의 끝없는 추격
넬슨제독 넬슨제독
영국인들은 프랑스의 침략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영국의 항구에 도착하는 순간 영국의 운명은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영국이 섬나라였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바다를 지배하는 중요성을 어떤 나라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 해군은 프랑스 함대의 모든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1804년말 스페인과 프랑스는 연합하여 영국을 침략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스페인의 함대가 나폴레옹의 손안에 쥐어지게 된 것이다.
나폴레옹은 영국 침략을 위해 2000여 척의 배와 90,000명의 군대를 준비하였다.
나폴레옹의 군대들은 프랑스의 해안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그의 함대에 그의 지상군이 바다를 건너 영국에 도착할 동안 영국함대를 막으라고 명하였다.

그 당시 나폴레옹의 함대는 프랑스의 브레스트, 로쉐포트, 툴롱항과 스페인의 카디즈, 페롤에 흩어져 있었고, 영국 함대는 이들 항구 길목에서 프랑스 함대를 감시하고 있었다.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는 캐러비안 해에서 연합하기로 했는데, 이는 영국해협을 건너는 동안 영국 함대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의 총 지휘관이었던 빌레뉴브 제독의 함대는 툴롱항에 있었으며, 이를 넬슨 제독이 감시하고 있었다.
빌레뉴브 함대는 1805년 3월 30일에 마침내 툴롱에서 넬슨을 따돌리고 출항하여 대서양으로 향하였다. 넬슨제독이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빌레뉴브 함대가 지중해로 갔다고 여겨 이집트 근처로 함대를 움직였다. 그러나,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빌레뉴브 함대를 뒤쫓기 시작했다. 한편, 카디즈항에 있던 스페인 함대는 항을 빠져나와 빌레뉴브 함대와 연합하게 된다.

영국 침략 계획의 실패
빌레뉴브함대가 캐러비안해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에 도착했을 때, 빌레뉴브 제독은 페롤항에 있던 함대가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빌레뉴브 제독은 나폴레옹황제가 그가 영국해협으로 와서 영국함대로부터 막아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므로 페롤항으로 가서 남아있는 프랑스함대를 이끌고 북진하기로 했다. 페롤항으로 가는 길에 빌레뉴브 제독의 함대는 로버트 캘더 제독의 함대와 부딪히게 되었으나 캘더 제독을 따돌리고 페롤 바로 밑에 있는 항구인 비고항에 도착하였다.

나폴레옹은 5개월동안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영국 침략에 전력을 쏟고 있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연합하여서 프랑스를 침략하려고 하였다. 나폴레옹은 영국침략을 포기하고 군대를 움직여서 독일로 향하였다. 또한 그는 빌레뉴브함대에게 지중해로 들어와서 프랑스 지상군을 도우라고 명하였다.

해전 전후 상황

함대와 사령관
한산도 해전 전후의 상황 : 함대구성과 사령관
영국함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
사령관 총사령관 : 호라티오 넬슨 제독, 콜링우드 제독 총사령관 : 찰스 빌레뉴브 제독
함대 총 32척의 전선 프랑스 함대 : 26척, 스페인 함대: 15척
전투의 시작
빌레뉴브 제독의 함대는 10월 18일에 황제의 명을 따르기 위해 카디즈를 떠났다. 넬슨 제독은 카디즈에 9월 말에 도착하여서 프랑스 함대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휘하 장수들과 회의를 열었다. 넬슨 제독의 전투 전략은 프랑스 함대가 카디즈를 떠나기 전에 결정되어 지고 있었다. 넬슨 제독의 계획은 함대를 나누어서 일렬로 늘어서서 공격해 들어가는 것으로 정했다.

10월 21일에 넬슨의 영국함대는 스페인연안의 트라팔가곶에서 빌레뉴브 함대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넬슨 제독은 자신의 함대를 웨더와 리 분대로 나누었다. 그는 웨더 분대를 이끌고 콜링우드 제독으로 하여금 리 분대를 이끌게 하였다.

영국 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로 접근해 오자 빌레뉴브 제독은 카디즈항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명하였고, 이 때문에 그의 함대는 북에서 남으로 길게 늘어뜨린 전법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이와 같은 전법 형태는 가장 일반적인 것이었는데, 전선의 양쪽 뱃전을 적으로 향하게 해야 함포 사격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넬슨제독의 계획에 따라 영국 함대는 프랑스-스페인 함대의 중간 부분을 끊고 서쪽에서 끊고 들어갔다. 넬슨제독은 풍향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 때문에 영국 함대는 빠른 속도로 전지해 나갈 수 있었다. 넬슨 제독이 이끄는 웨더 분대는 빌레뉴브제독의 배인 부상테어 앞을 끊고 들어갔으며 콜링우드 분대는 더 남쪽을 끊고 들어갔다. 콜링우드 분대의 목표는 스페인 사령관의 배를 부수고 넬슨의 공격으로 흩어진 전선들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넬슨의 분대 중 두 척은 본대가 방향을 바꾸어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공격을 시작하기 시작하자, 빌레뉴브의 배보다 앞에서 전진하고 있던 배들을 공격했고, 콜링우드 분대는 뒤 쫓고 있던 스페인 함대의 분대와 맞서게 되었다. 교전이 무르익을 즈음인 1시 15분쯤 넬슨제독이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았다. 넬슨의 웨더분대는 프랑스 함대의 중간부분에 있던 배들을 격침시켰고 일찍이 분대에서 떨어져 나가서 싸우고 있던 2척이 있던 곳으로 향하였다. 이들과 교전 중이던 프랑스 함대의 분대는 넬슨의 웨더 분대가 자신들에게 향해오자 퇴각하였다. 넬슨제독은 그의 선장인 토마스 하디가 지켜보는 가운데 4시 30분에 숨을 거두었다.
결과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많은 해군을 잃었으며 21척의 전선은 영국함대에 포획되었다. 사상자는 프랑스군만 해도 엄청났는데 2218명의 프랑스 해군이 죽고 1,155명이 부상을 당했다. 스페인 군은 1,025명이 죽었고 1,383명이 부상을 당했다. 게다가 7천명정도의 해군이 포로로 잡히었다. 반면 영국함대는 배를 한 척도 잃지 않았으며, 넬슨 제독을 비롯한 449명의 해군이 죽었고 1,246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트라팔가르 해전의 영향

조선은 한산도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세 가지 이점을 누리게 되었다. 첫 번째로, 조선은 풍족한 곡창지대인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군량미 확보는 조선군에게 트라팔가르 해전이 끝난 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압승을 거두고 오스트리아에게 프레스버그조약에 사인하도록 하였다.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더 많은 땅을 프랑스에 할양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함대로는 강력한 영국 해군을 이길 수 없다고 여기고 그의 영국 침략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대신 나폴레옹은 영국의 대유럽대륙 무역을 막아서 영국의 경제적 힘을 축소시키려 하였다. 1806년 11월 21일에 그는 모든 유럽 국가들이 영국과 무역하는 것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선언하였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을 막아서 고립시키려고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책은 그를 고립되게 만들었으며 그의 제국이 무너지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대륙봉쇄령은 그의 제국과 제국 내 유럽 국가들 간의 분쟁을 초래했다. 1810년에 나폴레옹은 러시아로 군대를 파견했는데,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의 무역을 다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를 향한 그의 군사적 전략은 실패하였고 그의 권세는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영국인들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의 승리를 수백년동안 축하해왔다. 영국의 유명한 석상중 하나는 이 해전을 승리를 이끌었던 넬슨의 석상으로 영국의 수도 런던에 있는 트라팔가르 광장에 있다. 2005년에는 트라팔가르 해전의 200주년을 맞아서 영국 해군은 세계해군함대 전시, 루미나리에 축제 등과 같은 행사를 성대하게 열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