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레해전

칼레 해전은 스페인 아르마다(스페인어로 함대라는 뜻)가 영국을 침략하려는 군사작전이었다. 스페인은 영국을 다시 카톨릭 국가로 되돌리고 영국 해적들의 노략질에 대해 앙갚음 하려고 대규모 함대를 편성하여 영국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스페인은 많은 지상군을 준비하였으나 영국 뿐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어떤 항구에도 입항하지 못했다.
영국함대는 스페인 함대와 영국해협 주변인 칼레지방에 있는 그라블린 앞바다에서 해전을 치뤘다. 이 해전 이후에 스페인 점점 해양력을 잃게 되었고 이는 영국이 새로운 해양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역사적 배경

종교개혁
1517년에 독일의 성직자였던 마틴 루터가 95개의 반박문을 내었고 이 내용은 순식간에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곧, 마틴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파직되었고, 그의 교리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는 초석이 되었다. 후에, 웨스트팔리아 조약에 따라 독일의 지방영주들은 자신들 영토의 종교를 정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교운동은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환영받았고 구교와 신교간의 분쟁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칼라해전도 모습을 그린 그림 칼라해전도

영국은 로마 카톨릭, 즉 구교와 헨리 8세 치세 때에 등을 돌렸다. 헨리 8세는 로마 카톨릭 수도원의 재산을 빼앗고 영국 교회의 수장은 자신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이 그가 선언하게 된 이유는 로마정부가 자신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종교분쟁은 1572년 8월 24일에 프랑스에서 극에 달했다. 많은 위그노들(신교도들)이 마르게리타 공주 결혼식에서 구교도들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 당시 스페인의 국왕이었던 필립2세는 스페인 영토였던 네덜란드에 군대를 파견하여 신교도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막고자 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분쟁은 네덜란드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1566년 신교도들의 정당이 영국의 도움으로 반란을 꾀한다. 후에,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필립2세의 종교탄압 정책은 칼레 해전에서의 패전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네덜란드 신교도들이 스페인 지상군이 스페인 배에 오르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영국과 스페인의 분쟁
16세기에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힘이 강한 나라였으며, 신대륙인 아메리카 대륙에도 많은 식민지를 두고 있었다. 국왕인 필립 2세는 신실한 구교신자였으며 영국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었다. 스페인이 터키와 신교와의 전쟁에 전력을 다하고 있을 때 영국의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드레이크를 보내서 스페인의 배들을 노략하도록 도와주었다.

엘리자베스여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헨리 8세의 종교를 계승하였고, 유럽 대륙에 있는 신교 국가들, 즉 네덜란드와 같은 곳을 지원해 주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특히 네덜란드의 신교도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거리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네덜란드에 있던 스페인 세력이 영국의 큰 위협요소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스페인은 네덜란드와 주변의 플랑드르 지역에 강력한 군대를 주둔해 놓은 상태였다.

드레이크 초상화 드레이크

영국인들의 지속적인 스페인 선 노략으로 인해 스페인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필립2세는 1580년 7월부터 영국 선박을 감시하고 서인도제도와 대서양에서 계속해서 노략질을 한 드레이크를 벌하라고 영국에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는 오히려 드레이크에게 작위를 내렸고, 영국군을 네덜란드로 파견해서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펼치던 네덜란드를 도왔다.

영국과 스페인의 분쟁
필립 2세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가 죽고나자 영국 침략 계획을 세웠다.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던 메리는 스페인을 등에 업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기 때문에 처형되었다. 필립 2세는 로마의 도움을 얻고자 영국 침략 계획을 종교 전쟁으로 과장하였다. 마침내 필립2세는 침략 명분과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1587년에 드레이크경이 카디즈항으로 들어와서 필립 2세가 침략을 위해서 마련해 놓은 스페인 전선들을 대부분 침몰시켜서 미루어져야 했다. 이 전선들에 보급 물품들이 많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은 이런 물품들도 다시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스페인의 영국 침략 계획은 애초에 전설적인 제독이었던 산타 쿠르즈에 의해서 세워졌다. 산타크루즈는 아일랜드를 먼저 점령하고 그 후에 영국으로 전진하자고 제안하였으나, 그가 죽고 난 후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를 이어서 메디나 공이 다시 계획을 세웠다. 메디나 공은 뛰어난 군인이었지만, 해전 경험은 다소 부족한 이었다. 이 또한 스페인이 칼레 해전에서 패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필립2세의 계획은 그의 함대를 네덜란드에 있던 지상군인 파르마공의 군대와 합해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필립 2세와 측근들은 강력한 스페인 지상군이 영국에 내리자마자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전쟁준비
영국은 스페인 내부에서 정부를 모으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영국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하였다. 당시 영국의 수상이었던 월싱험은 그의 사람을 스페인 왕궁에 심어놓고 첩보활동을 벌이도록 하였다. 영국 고문서들을 보면 그가 스페인이 침략하기 1년 전부터 이미 침략 계획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은 침략 계획을 알게 된 직후 방어 전략을 세웠고 네덜란드의 신교도들과도 협력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동시에, 영국은 전선들의 구조를 변경하고 많은 배를 건조하였다.

스페인의 침략 계획 실행내용, 함대의 규모, 사령관의 이름등도 스페인 내에서 활동하던 영국 스파이들에 의해서 본국으로 전해 졌다.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한 스파이가 영국 정부로 보낸 편지내용에는 130척의 배가 영국 침략을 위해서 준비되었으며 돈 알론소 디 리바가 스페인 지상군 총 사령관이 되었다고 정확히 적고 있으며, 네덜란드의 파르마공에게 함대가 언제 도착할 것인지 알리기 위해서 한 스페인 배가 스페인 함대가 출발하기 전에 네덜란드로 떠났다 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이 편지는 사실 스페인 함대를 위해서 출병에 참여한 이탈리아 선장의 편지를 토대로 쓰여진 것이었다.

칼레해전 전후 상황

함대와 사령관
칼레해전 전후 상황 : 함대와 사령관
영국함대 스페인함대
사령관 하워드제독, 드레이크 제독, 호킨스 제독 총사령관: 메디나공
지상군 총사령관: 돈 알론소 디리바
병력 15,000명 총 : 28,000
지상군 : 20,000, 해군 및 추가병력:8,000
함선 총 : 197척
전투선 : 새로 건조한 갈레온선 20척을 포함한 75척
총 : 130척
전투선 : 65척, 병선:2척
스페인 함대의 출항
스페인 함대는 리스본항을 출항하여 오늘날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의 영토인 플랜더스 지방으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파르마공의 지상군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출항한 후 심한 폭풍 때문에 스페인 함대는 예정된 시각보다 더디게 영국 쪽으로 북상하였다.

7월 중순에 스페인 함대는 영국해협의 서쪽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7월 30일경에 스페인 함대는 영국 영토인 콘월지역에서 목격되었다. 이때 영국 함대는 플리머스 항에 정박하고 있었다. 스페인 함대는 초승달 모양의 전형을 취한 채로 영국해협을 따라 플란더스 지방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영국 함대와 스페인 함대가 처음으로 교전을 치른 후에 하워드 제독은 여국 함대를 네 개의 분대로 나누고 한 분대는 자신이 한 분대는 드레이크 제독이, 한 분대는 호킨스 제독이, 그리고 나머지 한 분대는 마틴경이 이끌도록 하였다. 영국 함대는 스페인 함대와 몇차례 교전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드레이크 경이 스페인 함대의 한 척을 포획했고 한 척은 스페인군의 실수로 불타 침몰하였다. 영국함대가 스페인 함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스페인 함대의 함포를 소모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메디나공이 파르마공에게 서한을 보내어서 함포와 탄약을 준비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함대와 반대로 영국 함대는 탄약 및 마실 물, 음식등을 근처 항에서 계속 조달할 수 있었고, 이는 승리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8월 6~7일경에 스페인 함대는 파르마군과 만나기로 한 칼레앞바다에 정박하였다. 스페인 함대는 이곳 바다의 수위가 낮았고 배의 크기 때문에 포구에 정박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앞바다에서 정박한 후 파르마군을 작은 배로 실어 나르기로 한 것이다. 영국 함대 또한 스페인 함대 근처에 정박하였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은 칼레에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사람을 파르마공에게 보내었으나 파르마공의 군대는 몇 일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최근 밝혀진 스페인 역사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그 당시 파르마 공은 이미 이 침략 계획이 실패한 것이라 여겨서 그의 군대를 내륙으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결전의 날
8월 6일이 되자 남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왔으며 이는 영국 함대에 큰 이점을 주었다. 스페인 함대가 영국 함대쪽으로 이 바람 때문에 나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정 즈음에 영국함대가 스페인 함대의 전선 사이로 불을 붙인 작은 배들을 보내자 스페인 선원들은 곧 자신들의 배가 폭발할 것이라고 여겨서 배들을 잇고 있던 줄을 잘라버리고 출항하였다. 함대의 전형은 이 때문에 흐트러졌고 스페인 함대를 무찌를 기회가 영국 함대에 왔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을 동안 영국 함대는 칼레항 근처에 있는 그라블린 항에서 많은 스페인 전선들을 침몰시켰다. 스페인 전선들이 영국 배들에 근접하여 올라탄 후 전투를 벌이려고 했으나, 익히 이 전술을 알고 있었던 영국 함대는 먼 거리에서 함포사격을 하고 스페인배의 접근을 피했다. 영국 전선들은 집중적으로 함포사격을 하였고 스페인 전선들은 영국 함대와 플랜더스 지방 사이에 끼인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 때,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서 스페인 함대는 이곳을 떠나 북쪽으로 북상할 수 있게 되어서 도망하게 되었다.
결과
스페인 함대는 영국 해협으로 다시 남하하여 오려고 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계속 북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메디나 시도니아 공은 침략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무기와 음식도 바닥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시도니아 공은 결국 퇴각하여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거쳐 다시 모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그 당시 스코틀랜드 왕이었던 제임스는 스페인 군이 스코틀랜드 항구에 입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제임스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잇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터였기 때문이었다. 제임스 왕은 이러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신임을 어기는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스페인으로 향하는 길에 스페인 인들은 심각한 음식 및 물 부족에 시달렸으며 태풍 또한 그들을 괴롭혔다. 굶주린 스페인 선원들은 메디나 시도니아 공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에 정박하여서 먹을 것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이를 미리 예상한 엘리자베스의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도륙되었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은 9월 13일이 되어서야 반절 남은 함대를 이끌고 산탄더항에 도착하게 된다.

칼레해전의 영향

칼레 해전이 끝난 후 영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은 1604년에 런던 조약이 조인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영국은 계속해서 네덜란드의 신교 세력을 지원하였고 스페인 선박들을 갈취하여서 부를 쌓았다. 시간이 갈수록 스페인 무적함대의 명성 또한 시들어 갔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몰락은 스페인의 해양력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스페인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스페인이 힘을 잃어갈수록 영국은 힘을 얻었다. 영국은 1600년에 동인도회사를 차렸는데 이는 영국제국의 기반이 되었다. 영국은 1604년에 스페인 외 유럽 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버지니아라는 식민지를 세우게 되었다. 버지니아라는 이름은 처녀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를 기념하고자 지어졌다고 한다.

참고자료

영화
  • 엘리자베스 : 유니버셜 영화사, 2007
  • 세계를 변화시킨 50인의 전쟁 영웅 : 윌리엄 웨버, 2007
  • 스페인 아르마다의 패배 : 가레트 마팅리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