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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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호국정신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 속으로 여행을 떠나자!
  • 임진왜란 관련 행사나 승첩지 등 여러분의 역사의 현장체험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1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2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3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4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5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 지정번호 사적 제114호
  • 주소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산 58 
  • 전화번호
  • 홈페이지 완도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묘당도는 고금도에 딸린 섬으로 그 거리는 20리 안팎이다. 임진·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선조 31년(1598) 2월 17일 충무공 이순신이 수군 8,000여 명을 거느리고 고하고(현 목포시 충무동)로부터 이곳에 옮겨 진을 쳤고, 그해 7월 16일에는 명의 원병 수순도독 진린이 배 500여 척으로 고금도에 도착, 연합전선을 펴 왜적의침략을 막아냈던 유허이다. 특히 이곳은 바닷길의 요새지로서 이충무공이 고금도에 진을 옮긴 뒤부터는 장흥 등지를 근거로하여 살륙과 약탈을 일삼던 왜군이 순천방면으로 도주해 버림으로써 전투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공은 이 때 우선 본영을 건설한다든지 피난민들을 거두어 둔정하는 일 등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유성룡은『징비록』에서「공이 고금도에 이르렀을 때는 군의 위세도 장했거니와 섬안의 민가만도 수만호에 달해 옛날 한산도 시대보다 오히려 10배나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이충무공이 고금도에 진을 치고 있던 8월 18일 임진왜란의 원흉인 풍신수길이 사망하였다. 그러나 아군은 그의 사망을 알지 못했으며 다만 왜군이 철수하려 한다는 낌세를 알고 조선과 명나라군은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추격태세를 갖추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연합함대는 9월 15일 고금도를 떠나 좌수영방면으로 이동을 서둘렀다. 실로 충무공 이순신이 2월 18일에 이곳에 도착해서 7개월 만이다. 그후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이곳에 안장하였다가 아산을 옮겼다. 이 사당의 유래를 보면 이 자리에 본시 명군 도독 진린이 있을 때 사당을 짓고 관왕(관우)을 배향했었는데 그 후 현종 때 절도사 유배연이 중수하고 승려 천휘로 하여금 그 곁에 암자를 짓고 제사케하는 한편 딴 채하 하나를 지어 충무공과 함께 진린을 모시게 하였다. 그 뒤 정조가 탄보묘란 사액을 내리고 뒷 날 왕명으로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명의 부총관 등자룡을 아울러 배향케 하고 암자 이름도 옥천사라 고쳤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다시 수난을 당하게 되어 제사도 끊기고 말기에는 관우상까지도 바닷물에 던져졌으나 불상만은 건져 다른 사찰로 옮겨 졌다. 해방 후 관왕묘 옛자리에 충무사를 새로 짓고 충무공을 모셔 제사를 지내고 있다. 경내에는 공의 영당과 숙종 39년(1713)에 세운 사적비가 있으며, 명나라 수장이 충무공 이순신 전사를 애석히 여겨 여기서 서혈하고 귀국하였다는 내용의 비석이 있다. 주요 건물로는 사당과 부속건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