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김덕령(金德齡) 1568(선조 원년) ~ 1596(선조 29)

본관 광산(光山). 자 경수(景樹). 시호 충장(忠壯).

아버지는 붕섭(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반씨(南平潘氏)로 직장(直長) 계종(繼宗)의 딸이다. 20세에 형 덕홍(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전라도 경내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이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받고 이어서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뒤 최담년(崔聃年)을 별장으로 하여 남원에 머물다가 다시 진주로 옮겼는데,
김덕령 유품 권율 영정

이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조달의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였으며, 이로써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서부지역의 방어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하여 진해ㆍ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하였으나 이때 강화회담이 진행중이어서 별다른 전투상황도 없고, 또 군량의 부족으로 그 예하 3천여 명 가운데 호남출신 5백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그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이를 크게 무찌르고 이어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그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하여 출전의 차비를 갖추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울화가 생겨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 함에 막료ㆍ군졸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 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1596년에는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하여 투옥되었으나 영남유생들의 상소와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해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하였다가, 난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때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최담년ㆍ곽재우ㆍ고언백(高彦伯)ㆍ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ㆍ김응남(金應南) 등이 그의 무관함을 힘써 변명하였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神勇)이 있었다고 하여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에 봉사손(奉祀孫)인 수신(守信)도 녹용되었다. 1788년(정조 12)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조47特命)이 내려졌다. 죽기 전에 지었다는 〈춘산곡 春山曲〉 시조 한 수가 전한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는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