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

명량해전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이순신(李舜臣)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수군을 명량(울돌목)에서 대파한 해전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수군은 대부분 패하고 말았으며, 그해 7월 22일 유성룡(柳成龍) 등의 간곡한 건의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휘하군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하였으나 남아 있던 전선(戰船)은 겨우 12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일본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고 있었으며, 육군의 육상진출과 더불어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하여 이진(利津)ㆍ어란포(於蘭浦) 등지를 거쳐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이동하였다.

일본수군은 벽파진에 있는 조선수군에 여러 차례 야간 기습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우리측의 철저한 경계망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적정(敵情)을 탐지한 이순신은 명량을 등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9월 15일 조선수군을 우수영(右水營:해남군 문내면)으로 옮겼다. 다음날인 16일 이른 아침 일본수군은 명량으로 진입하고 있었으며, 망군(望軍)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은 출전령을 내리고 최선두에 서서 명량으로 향하였다. 그때 명량의 조류는 거의 정조시기(停潮時期)였으며 일본수군의 전선은 133척으로 확인되었다.
명랑해전도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모습 명랑해전도 - 해군사관학교

이순신은 명량으로 들어서면서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하여 일본수군의 수로통과를 저지하려 하자, 일대 혼전이 전개되고 조류는 서서히 남동류(南東流)로 전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수군은 이순신이 타고 있는 전선을 포위하려는 기세였다. 매우 위급한 순간, 이순신은 뒤에 처져 있는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中軍) 김응함(金應緘) 등을 불러들여 적진으로 돌진하게 하자, 전투는 절정에 이르렀다.

또한, 전류하기 시작한 조류는 소수의 전선이 활동하는 조선수군에 비하여 많은 전선을 거느리고 있는 왜군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하였으며, 협수로에서의 불규칙한 조류분포로 인하여 서로의 진형(陣形)과 대오(隊伍)가 붕괴되고 있었다.

격전중 이순신의 전선에 동승하였던 투항왜인 준사(俊沙)가 적선을 내려다보며 "꽃무늬 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 때의 일본의 수군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다."라고 외치므로 이순신은 김석손(金石孫)을 시켜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자, 이를 본 일본수군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에 전기(戰機)를 잡은 조선수군은 현자총통(玄字銃筒)과 각종 화전(火箭)을 쏘면서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丁應斗) 등 여러 장령들이 적선 31척을 분파하자 일본수군은 퇴주하고 말았다.

이 해전은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10배 이상의 적을 맞아 협수로의 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그들의 서해진출을 차단함으로써 정유재란의 대세를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열세한 병력을 지휘한 이순신은 위장전술로써 피난선 100여척을 전선으로 위장하여 뒤에서 성원하게 하였다는 것과, 철쇄(鐵鎖)를 협수로에 깔아서 적선을 전복시켰다는 기록도 일부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