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교성전투

예교성전투

1598년 9월부터 11월에 걸쳐 조명 연합군이 순천 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섬멸하기 위해 육해상으로 부터 공격한 전투로 왜교성(倭橋城)전투라고도 부른다. 이 전투는 광양만과 해룡면 일대의 육해상에서 펼쳐진 임진왜란 막바지 최대의 결전이었다.

1597년말, 조명연합군의 울산 도산성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후 명나라 경리 양호는 군을 세 방면으로 나누어 일본군을 공략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군문 형개가 동의하면서 삼로병진 전략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598년 3월에는 조선 조정에 세갈래로 군을 나누어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통보가 전해졌고, 얼마 후 수군까지 더해져 사로병진 작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동로군의 '마귀'는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에게, 중로군의 '이여매'는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패하면서 공격이 더뎌지게 되었다. 서로군이었던 '유정'과 수로군이었던 '진린'은 왜교성에 주둔 중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유정은 처음부터 예교성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고자 하지 않았다. 싸움보다는 고니시를 유인하여 생포하고자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9월 20~22일까지 수로군과 합동으로 예교성을 공격하였으나 소극적인 공격으로 수로군만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서로군은 다시 10월 1일 예교성을 공격하였으나, 진린의 수로군이 적극적으로 공격하였음에 반해 유정은 다시 소극적인 태세로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 때 중로군이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유정은 철군을 하고 말았다. 진린의 수로군만 피해를 입고 다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예교성 전투에 대해서 ‘난중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0월 2일, 새벽부터 정오까지 예교성을 공격하여 많은 일본군을 사살했지만 사도첨사 황세득과 이청일 등이 총에 맞에 전사하고 제포만호 주의수 등이 총상을 입는 피해가 있었다.
3일에도 연합함대가 출진하여 해상 공격을 계속 했는데, 썰물로 갯벌에 갇힌 진린의 사선 19척, 호선 20여 척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 손실되고 수백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조선수군이 구원하지 않았다는 책망을 염려하여 우리 전선 7척을 투입해 같이 갯벌에 걸리게 했는데, 우리 전선의 선체가 높고 튼튼하며 선상에서 화살을 쏘아대며 일본군의 접근을 막아 다음 조수 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진린은 4일에도 연합함대를 이끌고 공격을 계속했으나, 유정의 육군이 호응하지 않아 효과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진린은 직접 유정을 찾아가 항의하였고 두 지휘관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더욱이 유정이 6일 예교성의 포위를 풀고 부유창으로 퇴각하자 서로군과 수로군은 서로 단독 작전을 펴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진린은 다른 명나라 장수처럼 조선 수군의 일본군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대국 수군의 위엄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조명 수군이 합동 작전을 펼칠 때마다 이순신의 조선군보다 전공에서 뒤지는데 자존심이 상해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진린의 요구사항을 대부분 들어주었으나 일본군에 대한 공격만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진린은 이순신의 무인으로서 의지와 기개에 감명을 받아 이후 적극적으로 이순신 장군의 말을 수용하고 함께 전쟁을 치루게 되었다.
진린이 훗날 선조에게 ‘이모(李謀)는 경천위지지재(經天緯地之才) 보천욕일지공(補天浴日之功)’이라고 극찬한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이순신 장군을 존경했는지 알 수 있다.

이순신과 진린 제독은 육군으로 예교성을 고립시키고 지구전을 벌여 일본군을 피곤하게 한 다음 다시 수륙 합공을 하자는 전술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고니시가 철군할 경우 해로를 택할 가능성이 높을 것을 예상해 적극적으로 예교성 주변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철군을 계획하던 고니시는 조명연합 수군이 바다를 막자 유정을 다시 매수하였고 남해안 주변의 일본군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로써 조일전쟁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의 서막이 오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