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의 부처미이

구암의 부처미이

구암리(龜岩里)를 부처미이(佛頂)라고 부르며 구암초등학교를 '부처미이학교'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의성읍에서 점곡(點谷)을 경유하여 청송(靑松)으로 가는 길이 구암교(龜岩校) 정문 앞을 지나가는데 이 길을 따라 동쪽으로 약 1KM 가면 산고개가 있고,그 고갯길 동편에 수백년 묵은 소나무 밑에 부처가 길을 향해 조용히 앉아 있다. 부처는 석불이며 머리 부분이 없던 것을 시멘트로 만들어 붙였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380여 년 전 임진왜란때 명군(明軍)이 원군으로 와서 왜군(倭軍)을 무찔렀는데 이때 명나라 군사의 지휘관은 이여송(李如松)과 이여백(李如百)이었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용감한 군인과 함께 왜군(倭軍) 섬멸에 힘썼다. 그러나 이여송(李如松)의 형 이여백(李如百)은 아깝게도 전사(戰死)했다. 형을 전장(戰場)에서 잃은 이여송(李如松) 은 승전하였으나 형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그의 아픈 가슴은 달랠 길이 없었으며 슬픈 마음은 점차 불만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또 자기 아버지 이승량(李承樑)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자기의 윗 조상이 당시 조선에서 살았는데 조선사회에서 적서의 차가 엄격해서 자기네는 서자(庶子)로서 설움과 불만을 안고, 명(明)나라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국명(國命)에 의해서 조선을 도와 용감히 싸우기는 했으나 마음 한 구석에는 불만이 도사리고 있었고, 또 자기 형제가 명군 (明軍) 지휘관으로 전쟁에 나오게 된 주원인이 당시 조선의 황(黃)씨 성(姓)을 가진 상인 때문이었다.

황씨는 조선과 명나라를 왕래하면서 장사를 하였는데 한 번은 많은 물품을 갖고 명나라에 가서 여관에서 여장을 풀었는데 이웃집에서 슬피 우는 처녀가 있었다. 우는 원인을 물어본즉 처녀의 부모가 천 냥의 빚을 지고, 갚을 길이 없어 돈 대신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었다. 황씨 상인은 서슴지 않고 자기의 돈 천 냥을 이 처녀에게 주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처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로부터 수년 후에 이 처녀는 명 (明)나라 승상의 아내가 되었다.

그 때 조선에서는 왜병(倭兵)들이 물밀듯이 쳐 들어와서 나라 사정이 난처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명나라에 청병하기로 결의하고, 사신을 곧 명나라에 보냈다. 사신은 곧 압록강을 건너 얼마가지 못해 여관에서 자게 되었는데 그날 밤 노파가 당신들이 중요한 임무를 띠고 온 것을 내가 알고 있다면서 이여송의 초상화를 보이면서 이 사람을 꼭 모셔가야 하지, 딴 분을 모셔 가면 큰 일이 난다고 하였다.

그 길로 곧 명나라 주황제(朱皇帝)를 만나 용무를 아뢰었다. 그랬더니 장수 두 명과 많은 병정을 원병으로 보내기로 약속하는데 장수 두 명 가운데는 이여송(李如松)이 들지 않았다. 도원수를 외국 원병으로 보내기를 싫어하는 눈치였다.

이때 황씨가 도와 준 처녀 (승상의 아내) 가 이 사실을 알고, 자기 남편에게 대국의 위신을 위해 명장 (名將) 이여송을 조선에 원병으로 보내야지 만약 딴 사람을 보내서 실패한다면 대국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다고 간했다. 승상은 천자에게 15만 왜병을 무찌르려면 누구보다도 이여송이 적절하다고 아뢰었다 한다.

이 사실을 이여송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이 일을 상기한 이여송은 화가나서 황씨의 고향인 청송으로 말을 달렸다. 구암고개에 이르자 말발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놀란 이여송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길 동편에 있는 석불을 발견했다. 그만 성난 눈길을 쏘아보드니 칼을 빼어 석불의 목을 베었다. 그래도 여한이 있어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서 산혈까지 짤랐다고 한다.

'부처목이'란 말이 목 없는 부처가 있는 고개너머마을 이라는 뜻인지, 아니면 부처가 있는 산 고개너머의 촌락이라 해서 '부처미이'인지, 그도 아니면 부처가 있는 산맥지라 해서 '부처맥이'인지 확실 한 것을 알 수가 없다. 춘산면(春山面) 빙계리(氷溪里)에 있는 부처막(佛頂)은 부처의 이마 모양을 했다 해서 생긴 이름이며 이곳을 '부처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짐작해서도 구암리(龜岩里)를 '부처미이'라고 하는 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부처와 관계된 곳이라고만 생각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