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군 마분동

울진군 마분동

조선 명종 말기인 서기 1565년 김언륜 장군은 경북 울진군 북면 고목리 지장골에서 태어났다. 골격이 장대하고 기상이 비범하여 인근 주민을 놀라게 하였는데 소년기에 이르자 한학 수업을 틈타서 병서를 심독하고, 활쏘기와 칼 쓰기를 좋아하더니 20세 되던 해부터 "쇠도리깨" 쓰는 연습과 승마를 일과로 삼아 가리산 준봉을 뛰어 오르고 내리는 것이 비호와 같았다.

그때부터 장군은 묵묵히 호국충성의 시기만을 기다리던 중 장군의 나이 27세 되던 즉,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 258,000명의 대군이 부산에 불법 상륙하여 전국을 엄습해 왔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소서행장의 1지대는 익년(癸巳)에 남무묘법연화경 이라는 병기를 선두로 울산에 도착하여 육로로 북상하고 또 1지대는 강릉에 상륙하여 일부는 남하하여 남북의 연결을 꾀하였다. 그 접선지가 바로 울진으로 전쟁이 가장 심하였던 곳이다.

당시, 주호 장군은 향군을 통솔하고, 읍성을 고수하면서 북상하는 적을 방어하고, 대장 김언륜은 창의의 민병으로 북면 덕천 앞 호반에서 임수진(臨水陣)을 펴고, 남하하는 적을 섬멸하여 적의 남북 접선을 차단하고, 적의 약화를 꾀해 급습하자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북상하는 적은 고산읍성을 포위하고, 격전 10여 일만에 아군은 식량 및 식수가 고갈하고, 무기가 절진됨에 따라 적이 북문을 격파 돌입하여 성내의 관장과 병사는 한 사람도 남음이 없이 모두 전사하여 혈류 만곡이 되었다.

한편 덕천리 벌이골싸움에서 김언륜 장군이 남하하는 적을 반격하여 번개같이 쇠도리개로 적을 공격하니 사졸들은 용기백배하여 역전 고투한지 3일만에 적의 시체는 산적하였다. 적은 고산성 전승부대를 모아 덕천으로 진격하여 오므로 김장군은 복배수적이 되자, 이름을 날리던 장군의 활이 호반의 전 초적을 무수히 사살하였다. 그러나 아군은 병기도 열악할 뿐만 아니라 지원병이 전연 없고, 적은 남북으로 후속 부대가 증가되어 또 다시 수일을 계속하는 전투에서 김언륜 장군은 총탄에 맞아 분하게도 28세의 젊은 나이에 장렬히 전사하였다. 공을 세우고도 나라에서 주는 상은 받지 못했다는 기록이 경종때 진사 백시승의 문집에 있다. 본 전투에서 쌍방의 군졸과 병사의 사상이 산적하였으니 임진왜란에 있어 영동 최대의 격전지가 울진이었다 한다. 그때 덕천리 해안 사장에 전사자를 매장하였는데 병사가 수없이 죽어 묻혔다 하여 그 후 동명을 마분이라고 불렀으며 현재 묘지가 이장되어 울진군 북면 덕천리 원자력발전소 후문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